벌써 일본 생활도 9년째. 이렇게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일본에서 살고 있고 내 예상보다 더 즐겁고 마음 편하게 생활하고 있다. 이제는 한국에서 유행하는 게 무엇인지, 친구들과의 대화 중에 나온 새로운 명사(과자나 음료 이름과 같은)들을 검색하지 않으면 잘 모를 정도로 한국과 멀어지기도 했고 오랜만에 출장이나 개인 일정차 서울에 가게 되면 난 이제 대도시에서는 못 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본 생활이 길어지면서 한국에서는 전혀 하지 않던 일들인데 일본에서는 매일 루틴처럼 굳어진 것들이 있다. 사실 한국에 있으면서도 챙길 수 있는 루틴인데 일본 생활을 하면서 몸에 베인 생활습관들을 적어보려 한다. 그 첫 번째는 어느새 생활필수품이 된 양산되시겠다.
📝어느새 생활필수품, 양산
입사 후 얼마 되지 않아 비슷한 나이대의 회사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러 갈 때의 일이다. 회사 현관을 나서자 다들 점심용 보조가방에서 양산을 꺼냈다. 1단, 3단, 5단에 이르기까지 양산의 종류는 아주 다양했다. 그때만 해도 양산은 어머님들이 드는 화려한 꽃무늬 양산만을 생각했었는데 일본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꽃무늬가 없는 건 아니다. 한국이 더 화려할 뿐이다) 처음에는 굳이 양산까지 필요한가? 싶었는데 여름으로 향하면서 양산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우선, 일본은 자외선이 아주 강했다. 여름에 일본 여행을 와 본 사람이라면 아마 모두 공감하지 않을까. 자외선이야 선크림을 바르면 예방할 수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바깥으로 노출되는 얼굴과 팔, 어깨에 점이 미친 듯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걸 보면서 양산이 없으면 안 되겠다는 절로 들었다. 그래서 1단, 안감이 회색이었던 양산을 구입했다. 그게 내 첫 번째 양산이었다.
처음에는 어디 갈때마다 양산을 들고 다니는 게 귀찮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잠깐 외근 갈 때도 양산을 챙겨가는 동료들을 보면서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그 이후로 꾸준히 기능성 양산(?)으로 업데이트하면서 비가 오지 않는 날은 양산, 비 예보가 있는 날은 양우산을 들고 다닐 정도로 생활 속 필수품이 되었다.
📝내 그늘은 내가 만든다, 양산의 이점
양산의 또 다른 장점, 바로 양산을 펴면 그 자리는 그늘이 된다는 점이다. 자외선 문제 이전에 햇빛이 뜨거운 날이 많은 여름에는 특히 필수이다. 한국과 비교해 가로수가 부족해서 그늘이 없는 땡볕이 많은 일본(우리 동네만 그럴 수도 있다)에서 '내 그늘은 내가 만든다'는 의지로 양산을 챙기게 되었다. 양산을 쓴다고 극적으로 시원해지지는 않지만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호흡하기 편해지기 때문이다. 어느새 내게 있어 양산은 생존 아이템이 되어갔다.
최근에는 히가사 단시(日傘男子)라는 말이 생겼는데, 양산을 들고 다니는 남성을 뜻한다. 양산 = 여성의 생활필수품에서 남성에게도 필요한 아이템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맑은 날 출근길에 아주 큰 크기의 양산을 들고 있는 남성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더위와 자외선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리라.
실제로 일본의 양산 판매율은 매년 늘어나고 있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9년 양산 총 판매량이 약 230만 개였는데 2023년에는 약 300만 개가 팔렸다고 한다. 역대급 더위라 불리는 올해는 아마 그 이상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어제까지는 태풍 '산산'의 영향을 받아 비가 왔기 때문에 우산을 들었지만 오늘은 오랜만에 양산을 든다. 아직 바람이 세기 때문에 튼튼한 1단 양산을 들도 외출해 본다. 자외선 차단하며 다녀오겠습니다:D